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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필리피노]서지오 오스메냐(SERGIO S. OSMENA, 1944~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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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코리아포스… 댓글 1건 조회 2,295회 작성일 11-03-2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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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필리피노]서지오 오스메냐(SERGIO S. OSMENA, 1944~1946)

  

1026455371-osmena.jpg서지오 오스메냐는 1878년 9월 9일 시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메냐는 마누엘 로가르타가 소유하고 있던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오스메냐는 그때부터 학교에서 가장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지목받기 시작했다. 산카를로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오스메냐는 마닐라의 레트란 대학에 다시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후에 필리핀 공화국 제 2대 대통령이 된 마누엘 퀘죤을 만나게된다. 미국과 필리핀 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오스메냐는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메냐는 학교를 산토 토마스로 옮겨 그곳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마누엘 퀘죤을 만나게 된다. 오스메냐와 퀘죤은 1903년에 치러진 사법시험에 모두 합격했다. 오스메냐는 차석으로 시험을 통과했다. 1900년 4월 17일 시부가 여전히 미국의 영향권 내에 있을 때 오스메냐는 미국 당국의 허가를 얻어 스페인어판 신문을 발간할 수 있게 된다. 그 신문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민족주의를 일깨워 주기 위해 발간되었다. 그러나 신문의 생명은 3년밖에 가지 않았다. 서지오 오스메냐는 에스테파니아 치옹이란 여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부인을 잃었다. 그는 1920년 에스페란자 린합이라는 여인과 재혼했다.

필리핀 국회가 구성되고 오스메냐는 하원의장직을 맡게 된다. 이는 미국의 통치하에서 운영되던 정부에 처음으로 필리핀인이 등용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깊다. 오스메냐는 1922년까지 하원의장직을 맡았다.

오스메냐는 25세의 나이에 미국의 라이트 총독에 의해 임시 시부 주지사로 임명된다. 1906년 2월 선거에서 오스메냐는 시부 주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그의 막강한 라이벌이었던 빈센테 소토와 마가리타 아빌라를 제치고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1906년 3월 6일 그는 시부 주지사로 취임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오스메냐는 국회에 합류하기 위해 주지사직을 사임했다.

오스메냐는 곧 네쇼날리스타 당에 입당하고 동료의원들에 의해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07년부터 1922년까지 무려 15년간 하원의장직을 맡았던 것이다. 1935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스메냐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 않고 대신 마누엘 퀘죤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오스메냐와 퀘죤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둘은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의 진정한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퀘죤은 활동적이었으며 오스메냐는 매사에 신중했다.
그들은 미국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했다. 1944년 8월 1일 마누엘 퀘죤이 결핵으로 미국에서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오스메냐는 자동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 장군에 의해 레이테가 수복되자 오스메냐를 비롯한 정치가들이 필리핀 본국으로 돌아왔다. 오스메냐의 임기중 국내에는 여러 어려운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 도로, 다리 등을 모두 복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스메냐는 그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국민들 사이에는 그가 구호물자를 적절히 배분하지 않았다고 하는 원망의 말들이 오갔다.
1946년 4월 23일 대통령 선거에서 오스메냐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만 숙적인 마누엘 로하스에게 패하게 된다. 사실 오스메냐는 대통령에 출마할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속당의 권유에 못이겨 출마했으며 선거운동 또한 매우 미약했다. 항간에서는 로하스 후보가 선거부정을 저질렀다는 비난의 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스메냐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직권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거에서 패한 후 오스메냐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시부로 갔다.
1961년 10월 19일 오스메냐는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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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마니님의 댓글

산가마니 작성일

유익한 정보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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