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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라모스(Fidel Ramos, 1992-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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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코리아포스… 댓글 1건 조회 1,972회 작성일 11-03-28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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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라모스(Fidel Ramos, 1992-1998)

 

1027737873-ramos.jpg아퀴노 정권 동안 발생했던 6차례의 반란(그중 2차례는 유혈사태였음)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던 피델 라모스의 탁월한 군부지휘 능력이 인정받음으로 그는 아퀴노 정권 이후 선출될 대통령으로의 자리를 굳건히 다져왔다.

라모스 대통령은 팡가시난의 링가옌에서 1928년 3월 18일, 날시소 라모스와 안센라 발데즈 사이의 3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팡가시난 뉴스의 편집장이자, 전 리포터였으며 감리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진취적 사상의 신도였다. 이러한 아버지와 가정 환경으로 라모스는 성장기를 거쳐가며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친화력을 높이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안셀라 발데즈는 피델 라모스와 그의 두 동생들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녀 또한 지성을 겸비한 선생님이자 진실한 사회 봉사자로 활동했다. 라모스는 매우 영리한 소년이었으므로 그가 5세일 때 벌써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다. 그는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링가얀 초등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라모스는 학업을 일찍 시작하였지만 다른 학생들과 다른 점 없이 잘 융화하였다.

그가 즐겨했던 놀이는 연 날리기였으며 항상 가장 높이 연을 날려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그는 또한 나무 오르기에도 친구들 못지 않은 재량을 보였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입 언저리에 있는 흉터는 유년시절 나무에 오르다 떨어져서 생긴 것이다. 그의 가족은 라모스의 아버지가 팡가시난에서 정계로 진출하여 마닐라로 이사했다. 이 기간 동안 라모스는 학업을 UP에서 마쳤다. 라모스와 그의 가족은 파드레 파우라의 듀플렉스에서 생활했다.

그의 이웃으로는 말티네즈 가족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말티네즈 가족의 장녀 아멜리타는 라모스와 대학시절 같은 반 친구였다. 아멜리타를 포함한 그의 반 친구들 사이에서 라모스는 그의 지성과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유명했다. 라모스의 유명세를 입증하듯 그는 그 학과의 과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라모스와 아멜리타가 14세였을 때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대학은 전쟁으로 인해 휴교되었지만 휴교임에도 그들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YMCA에서 실시하였던 타이핑과 전문대 과정에 등록하였다. 라모스는 이 학업 중에도 그의 반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선정되었다.

전쟁기간 동안의 삶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라모스의 여동생인 래티가 가족을 돕기 위해 닭을 키웠고 그녀의 삼촌과 함께 파코와 말라테에서 바나나를 팔았다. 그의 아버지는 전시에 게릴라로 활동하여 라모스에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라모스는 미국 뉴욕의 서부에 위치한 미군사관학교에 입학신청을 했다. 그는 수학과 과학과목의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시험을 통과하게 되었다. 라모스는 1950년 웨스트 포인트에서 과학 부분의 학사과정을 이수하였고 이리노이스 대학에서 다시 사회기술과를 이수한 후 1951년 필리핀으로 되돌아 왔다.

군부에서 제 2소대 중화기 부대의 지휘자로 지명된 라모스 중사는 1952년, 한국 전에 필리핀 특수 부대원 중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952년이 다 지나기 전 라모스는 필리핀으로 되돌아 왔고 아멜리타 또한 미국의 보스턴 대학에서 보건교육학을 마친 후 귀국하였다. 그들은 구멜신도 가르시아가 인도로 출국하기 위해 환송준비를 하는 기간 동안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의 만남이 잦아지던 어느 날 라모스는 아멜리타를 보니파쇼 기지와 캠프 아귀날도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그 곳에서 라모스가 그녀에게 군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1953년 4월부터 사랑을 나누는 연인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너무 짧은 기간 동안의 연인관계 이후 결혼을 계획하려는 그들을 꺼려했지만 아멜리타는 그들이 20년 이상의 오랜 친구관계를 지속해 왔음을 상기시키며 결혼을 허락할 것을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들은 1953년 10월 21일 극적으로 결혼에 성공했다. 그들 두 사람은 안젤리타 라모스-존스, 크리스티나 라모스-잘라스코, 카롤리나 라모스-셈브라노, 조세피나 라모스-사말티노와 말지에 라모스의 다섯 명의 자녀를 슬하에 두었다. 그녀는 자녀를 양육하는 외에도 그녀의 학위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다. 1955년 그녀는 마카티 인터내셔널 스쿨의 선생님으로 일을 시작했다. 한편 라모스는 군인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1957년, 그는 16 포병대대, 제1 보병중대의 지휘자로 승격되었다. 그 후 1958년 북부 카롤리나의 브렉 성체에서 폭동 방지훈련과 심리적 교전상태 훈련을 지휘하도록 파송받았다.

3년 후 그는 필리핀으로 돌아와 누에바 에시자의 막사이사이 성체에서 제 1특수경찰대로 복무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그는 무장경찰대의 낙하산 부대의 교육을 주관했다. 그가 가르친 훈련병들 중에는 그레고리오 그링고 호나산과 호세 알몬테가 가장 두드러진 결과를 기록했다. 1966년 라모스는 필리핀 전투단(필켁-Philcag)의 멤버로 베트남에 파송되었다. 일년이 지나자 그는 필켁의 수장으로 진급되었으며 베트남에 2년을 더 머물렀다.
라모스가 필리핀으로 돌아오자 그는 마르코스 대통령과 그의 가족의 직무를 처리하는 위치로 임명받았다. 대통령 군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또한 전투단의 수뇌부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라모스는 1971년 일성 장군으로 승격했고 제 3보병대대장으로 임명받았다.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한 1972년 9월 21일, 그는 계엄령 실시요원 중 하나로 활동했다. 1975년 이성 장군으로 진급된 그해 국내 경찰연합(INP)에게 경찰 조정권을 부여 받았다.

어느 누구도 언제부터 라모스가 마르코스정권에 대한 불신을 가졌는지는 거론할 수 없지만 1981년 그가 필리핀 전투단의 제 2수장으로 있을 때 파비안 벌이 수장으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라모스가 마르코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파비안 벌의 공적이 부족하였지만 그는 마르코스 가에 매우 충성스러웠으며 그들과 긴밀한 사이였다.

파비안 벌은 마르코스 가를 위해 운전기사와도 같이 일을 했다. 그의 지위는 대통령 경호대장과 국내 첩보 안보국(NISA)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상승했다. 라모스는 군부의 승진구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이 구조는 군인들의 공적과 충성심,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닌 마르코스 가와 파비안 벌과의 친밀도에 따라 조정되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라모스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수가 많았다.

그는 중요한 모임들에 초대되지 않았으며 신문을 통해 알 뿐이었다. 때때로 그는 누가 진급한 것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놀라곤 했다. 마르코스의 병고는 국내 화제거리로 바뀌었으며 파비안 벌은 마르코스가 출세시킨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마르코스가 수술을 받기 전인 1983년 국방부에 주안 폰스 엔릴을 대신하여 파비안 벌을 임명했다. 그후 1개월이 지나자 벌은 경찰 통솔권을 부여받았다. 필리핀은 국내외에서 정부가 가진 부채로 인해 시작된 경제 위기로 심각한 분열상태에 들어갔다. 경제위기로 인해 세금과 생필품의 가격이 상승되기 시작했다. 페소의 가치는 하락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경제위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범죄율은 증가하였으며 시민들은 인권을 유린당했다. 또한 폭동으로 인한 문제들 역시 심각성을 더해 갔다.

이 기간 동안 베니그노 니노이 아퀴노 상원의원이 미국으로부터의 귀국을 결정했다. 니노이는 마르코스 제 1반대자였다. 그는 계엄령 당시 정치범으로 구속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니노이는 7년간 구류생활을 해 왔으며 그의 심장질환 수술을 위해 미국에서 3년 이상 머물렀다.

1983년 8월 21일, 필리핀 국민들은 니노이가 마닐라 국제 공항의 탈막에서 살해되었다는 정보에 충격을 받았다. 필리핀 국민들은 니노이의 죽음이 마르코스에 의한 것이라 믿었으며 이들이 생각한 제 1용의자는 당시 군부 통솔권을 쥐고 있던 파비안 벌을 꼽았다. 필리핀 국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와 미국의 압력에 의해 AGRAVA위원회가 니노이 아퀴노의 살해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마르코스는 파비안 벌을 잠시 파면시켰다.

파비안 벌의 임시 휴직기간 동안 라모스가 벌의 위치로 승격되기는 하였지만 고위관직자들을 통한 파비안 벌의 명령은 계속되었으며 실질적인 통솔권은 여전히 라모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같은 해 떠돌던 개혁군인움직임(RAM)에 대한 루머에 따르면 이것은 군부와 정부의 개혁을 원하는 군인들로 이루어진 연합이며 어떠한 근거도 없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라모스와 엔릴이 이 연합의 활동을 이끄는 주도적 위치에 서 있다고 믿었다. AGRAVA 조사위원회는 이 당시 니노이 아퀴노 살해 관련자로 파비안 벌을 지명하지 못했다.

1985년 12월 파비안 벌은 다시 그의 위치에서 정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의 재임이 실시되기 이전인 11월 3일, 마르코스는 대통령 임시투표를 1986년 2월의 예정으로부터 앞당겨 실시하였다. 마르코스의 막강한 권력을 통하여 대통령으로 또 다시 당선된 이 선거는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국민들에게 인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국민들의 불신이 강해지자 마르코스는 시민법을 강화하였다.

1984년 2월 22일, 엔릴과 라모스는 마르코스 정권 하에 자신들의 직위 사임을 결정하였고 코리 아퀴노의 임시 대통령 선거 승리를 알렸다. 이때 행해진 4일간의 EDSA 혁명에서 라모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필리핀 역사상 최 장기집권을 행하며 권세를 누렸던 독재자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 몇몇의 추종자들은 망명당했고 필리핀에 민주주의가 재정착되었다. 아퀴노 부인이 대통령으로 추대된 후 라모스는 필리핀 군부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퀴노 정권 동안 발생되었던 여러 반정부 시위들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사성장군의 위치에서 군부를 퇴직할 무렵 국방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국가 재해 대책회의의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92년 5월 11일, 정당소속 대통령 출마를 시도하여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코리 아퀴노 대통령이 재임의사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힌 후 그는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었으며 아퀴노 대통령 또한 라모스 대통령 후보의 대통령 직무능력을 신임한다고 말했다.

1992년 6월 30일, 드디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대통령 취임식을 거쳐 필리핀 대통령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라모스 대통령의 6년간 임기는 1998년 막을 내렸으며 그는 임기 동안 필리핀의 밝은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불러일으킨 필리핀에 대한 가장 유명한 감흥은 필리핀 2000으로 2000년에는 신생공업국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목표를 내포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제시되었던 3가지 경제 목표들을 열거하면 1) 국내 빈민층 비율의 감소. 2) 연간 순수익 천불로 상승. 3) 연간 10%의 GNP 성장률 달성.
필리핀 2000은 두 가지 주요 목표를 내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1) 국내 생산품과 서비스의 세계시장 경쟁력 향상. 2) 시민권 확대.

1994년 정전 발생은 감소되었으나 그 이전 에너지 위기로 인해 실시된 급작스런 전기요금의 인상은 국민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라모스 정권의 초기 2년간 정부와 반란군의 평화 회담이 국내 최고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아시아 태평양 경제 수뇌회담(APEC)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경제 발전의 국면(SPEED)이 강화되었다. 그는 필리핀에 많은 외국인 투자가들을 초청하여 필리피노들에게 많은 직업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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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마니님의 댓글

산가마니 작성일

유익한 정보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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