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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SA I 시민혁명 18주년맞이 특별보도-마지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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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코리아포스… 댓글 0건 조회 1,667회 작성일 11-03-2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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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SA I 시민혁명 18주년맞이 특별보도-마지막회


1079149809-heli1.jpg현재 20대부터 그보다 어린 세대 약 430만여명은 지난 1986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있었던 EDSAI 당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진정한 EDSAI을 재조명 하고자 책들과 신문기록등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이 내용을 통해 18년전 세계를 놀라게한 평화시민혁명의 의미와 당시 상황을 알아보자.

셋째날 : 1986년 2월 24일

새벽 12시 20분 : 준 케이슬리가 dzRJ(기독방송으로 바뀐 Radyo Bandido dzRB)를 통해 “Mambo Magsaysay” 기도를 시작하며 평화로운 사태안정 및 정권교체를 염원했다.

새벽 1시 : 펠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반군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성당의 종들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고 Edsa에 모여든 시민들은 타이어와 모래주머니, 바위돌을 쌓아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

새벽 3시 30분 : 캠프 크라메에서는 후안 폰세 엔릴이 장갑인원 수송차량 2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인간 바리케이트를 형성하고 있는 수녀들과 신부들, 시민들에게 전달하며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새벽 4시 : 워싱턴에서 미국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은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자진사퇴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피난처를 제공한다는 것에 상호 동의했다. 미 국무장관 조지 술츠는 마닐라 미국대사인 스테펜 보스워스에게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당신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는 통지를 하도록 지시했다.

새벽 5시 : 마르코스는 미국정부의 권유를 거부하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반란의 무리를 완전히 제거 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벌과 조세푸스 라마스 육군대장은 EDSA에 있는 반군들과 시민들을 해산시키고 밀어내기 위해 최루탄과 포술 연습함, 해군 포병대, 제트 폭격기를 출격시켰다.

크라메에서는 피델 라모스가 개혁군을 돕기위해 몰려든 시민들에게 대대적인 정부군이 공격준비를 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방비할 것을 알리는 한편 개혁군 측에서는 군인들이 서로 눈물을 머금고 전투 준비를 하며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는 내용의 필리핀 사관학교 찬가를 불렀다.

오전 5시 15분 : 캠프 아귀날도 바깥에 최루탄이 투하되었고 브라울리오 발바스가 이끄는 정부군이 캠프 내 골프장으로 진입했다. 더 많은 최루탄이 투하되었으나 강한 바람이 불어 최루가스를 정부군 쪽으로 몰아냈다.

오전 6시 : 중무장한 헬리콥터 7대가 크라메로 다가오자 캠프 내 개혁군 측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었으나 공격을 거부하고 개혁군이 있는 캠프 안에 착륙했다. 그 뿐 아니라 안토니오 소텔로가 이끄는 공군 15사단이 전원 개혁군과 연합했고 로돌포 에스트렐라도는 발바스가 전혀 모르게 개혁군과 연합했다.

한편 개혁군이 모여있는 캠프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한 포술 연습함에서는 코모돌 타굼파이 잘디니아노 함장이 배 안에 승선한 50명의 수하들에게 자신은 라모스와 엔릴군을 돕는다고 발표했다. 잠시의 침묵이 있은 후 전원은 그의 결정에 동의했다.

오전 6시 30분 : 케이슬리가 벌과 마르코스 가족이 필리핀을 떠났다고 공식발표했다.

오전 7시 30분 : 승리를 얻은 엔릴과 라모스는 크라메 바깥쪽에서 기쁨에 들떠있는 시민들과 함께 개혁군의 승리를 축하했으며 크라메 공격을 명령받고 출격했던 공군 전투기도 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를 하고 팜팡가 클라크 공군기지로 귀환했다.

오전 9시 : 마르코스는 자신의 가족들 모두 아무도 도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고자 4번채널을 통해 국가 비상사태를 발효함과 동시에 라마스는 발바스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다. 발바스는 이 지시를 받고 현재 방법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20분 후 라마스가 발바스에게 발포명령을 내리자 발바스는 “대포 배치 중입니다.”라고 대답하며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으며 12시경 발바스는 수하병력들을 모두 철수시키며 개혁군 측에 대한 공격을 무산시켰다.

오전 9시 50분 : 개혁군과 정부군이 채널 4 방송국 탈환을 목적으로 총격전을 벌였으나 곧 시민들에게 넘어가 마르코스의 기자회견 방송이 중단되었다.

10시 15분 : 개혁군이 말라카냥 진입을 시도, 11시 30분 시민들이 말라카냥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며 1시 25분 채널 4를 통해 개혁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방송이 시작되었다.

오후 6시 : 워싱턴에서 마르코스의 사임을 인정했으며 7시 30분경 미국 정부가 아퀴노의 정부를 인정했다.

셋째날 : 1986년 2월 25일

새벽 5시 : 마르코스가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어 미국 상원의원인 파울 라살트에게 자신이 사퇴해야하는지 의견을 묻자 그는 “당신은 깨끗하게 물러서야 한다.”고 대답. 30분 후 마르코스는 스스로 가족들에게 떠날 준비를 하도록 말했다.

오전 10시 15분 : 아퀴노가 산후안의 클럽 필리피노에서 넵탈리 곤잘레스 변호사로부터 대통령으로 공식 임명되었고 살바돌 라우렐을 부통령으로 발표했다.

오후 5시 : 마르코스는 엔릴에게 전화하여 자신이 말라카냥에서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약속할 것을 부탁했으며 저녁 8시 45분 마르코스 가족들과 다른 정부관계자들이 짐을꾸려 헬기에 승선하기 시작했으며 9시 5분부터 헬기들이 이륙을 시작, 9시 45분 마르코스가 클라크에도착, 9시 52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마르코스가 필리핀을 떠났슴을 발표했으며 미 공군방송 FEN이 마르코스의 출국을 공식 확인했다.

드디어 11시 30분 말라카냥의 문이 열렸다.

저녁 11시 30분 : 개혁군 봉기당시부터 라디오 베리타스를 방송하던 준 케이트리가 dzRJ 라디오 방송국으로 옮겨 베리타스 방송을 시작했으며 계속 이동을 하여 정부군의 추적망을 피했다.

탱크가 후퇴하며 군중은 약간 해산분위기를 띄었으나 인간바리케이트는 점점 두터워져만 갔다.

마르코스 정권을 버린 정치인으로는 라울 라베 호놀룰루 영사, 노엘 부안 중위, 토마스 만롱갓 육군중장, 레나토 데 빌라, 디오니시오 탄-가테, 카를로스 아귈랄, 베냐민 이그나시오, 로드리고 구탕, 나르시소 카브레라 경찰본부장, 루벤 에스칼차, 알프레도 이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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